프라하 - 체코 최고의 바이올린 독주자중 한 명이며, 작곡가 Josef Suk (1874-1935)의 손자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Antonin Dvorak (1841-1904)의 증손자인 Josef Suk가 지난 밤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프라흐 봄 음악 축제의 Antonin Matzner가 CTK에 전했다.
Suk은 여러 일류 음악가들과 함께 전 세계에서 연주를 했다. 또한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Suk은 긴 중환 끝에 병원에서 사망했다. 2002년에 연주경력을 끝내고, 오랫동안 연주회를 하지 않았다.
Suk은 주로 고전과 낭만 음악에 몰두했으나, 또한 Bela Bartok과 Alban Berg와 같은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했다.
Josef Suk은 1929년 8월 8일,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유년기에 그의 스승은 Jaroslav Kocian이었다. 1946-51년, 그는 Prague Conservatory에서, 1952-53년에는 Prague's Academy of Performing Arts에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는 1953-55년에 잠시 Prague Quartet을 이끌었고, National Theatre'의 드라마 그룹 오케스트라의 부대표(deputy leader)였다. 후에 그는 독주자와 실내약 연주자로서의 길에 들어섰다.
1952년에 Suk Trio를 결성했다.
1961-90년 사이에는 나라에서 가장 명망있는 교향악 오케스트라인 Czech Philharmonic(CF)의 독주자였다.
Suk은 1959년 CF가 세 대륙을 순회공연하면서 국제적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964년 그는 영국과 미국에서 데뷔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세계 정상의 오케스트라들과 연주를 했다.
1992-2000년에 그는 Suk Chamber Orchestra의 운영자이자 지휘자였다.
그가 국내외의 제작자들과 녹음한 CD들은 French Grand Prix du Disque Academia Charles Cros 6회 수상, Dutch Edison Prize, Mozart Society Prize in Vienna 등의 많은 상을 수상했다.
한달 전에 갑자기 이착 펄만이 리사이틀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표를 부탁.... 몇일 전 오늘 회식을 하겠다는 교수님의 말씀이 있었으나, 펄만의 나이와 체력을 봤을 때 언제 한국에 또 올 수 있겠는가? 하고 망설임 없이 연주회를 택했다. (내일 엄청 눈치 보이겠다...) 20만원이라는 거금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연주회에 늦을까봐 일찍 퇴근시켜달라고 졸라서 5시 30분 퇴근, 싸인회를 대비하여 펄만의 잘 나온 사진 몇장 인화하고 예당으로 고고씽.... 나중에 알고보니 싸인회는 없더라...
프로그램은 모차르트 소나타랑 베토벤 소나타 크로이쳐 외에는 전혀 모르는 상태로 도착, 프로그램 북을 사서 보니 그 외에 브람스 FAE 소나타랑 (sonatensatz), 슈만, 그 외에는 즉석곡? 아마도 쉰들러 리스트랑 소품들 하겠지... 라고 생각하고 입장... 재훈씨가 자리를 예약해 줬는데 아주 좋은 자리였다. 바로 펄만의 정면에서 약간 우측... 오늘 공연의 최고의 자리였다고 자신한다..
경쾌한 모차르트 소나타로 시작... 나이를 속일 수는 없는지.. 그리고 건강 혹은 자세의 문제인지 생각보다 간결하고 던지는 듯한 보잉으로 연주... 뒷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을 듯 하다.. 아참.. 악기는 1714 'Soil'로 추정된다... 스트라디바리 모델에 뒷판이 V자로 배열된 쿼터컷의 메이플..
두번째 곡은 대곡인 크로이쳐였는데, 펄만의 혼신의 연주를 봤다고 말하고 싶다. 어깨가 안좋은지 빠른 데타쉐 패시지에서 피아노 반주 템포를 따라가기가 좀 벅찬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곡의 템포도 다른 연주자에 비해서는 약간 느린 편이었다. 하지만 펄만의 왼손이나 오른 손목, 손가락은 살아 움직인다. 흔히 곰손이라고 부르는 굵고 뭉툭한 손으로 어찌 저런 기름진 소리를 내는지.... 그리고 특유의 쉬프팅 할 때 살짝 음을 미끄러트리는... 과하지도 않고 딱 감칠맛 난다.. 음반에서 듣던 그대로.. 나중에 자세히 보니 쉬프팅 하는 손을 살짝 끌다가 다음 포지션으로 이동..
크로이쳐를 한 악장 연주할 때 마다 수건이 땀으로 젖고 힘겨워 하는 기색이 엿보인다.
인터미션에 준하와 음료수를 마시고... 사실 오늘 일하다가 갑자기 한기가 들면서 몸이 안좋아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몸살이 오는 듯 하다.. 오늘 공연 내내 몸 상태가 좋지는 않았다.. 대충 오렌지 주스로 비타민 보충? ㅋㅋ... 몸살에 아무 도움도 안되지만 ㅡ.,ㅡ
2부는 브람스 FAE 소나타.. 비장미와 서정미가 동시에 서려있는 곡? 아주 옜날에 배우기는 했으나 완전 곡 망쳐놓던... 그 후 서정적인 슈만의 소품이 이어졌다...
하이라이트는 여기부터... 일단 크라이슬러의 Tempo di minuetto로 시작... 그 후에는 브람스 헝가리 무곡 1번.. 헝가리 무곡 중 내가 좋아하는 곡이다. 내 생각에는 펄만이 약간 편곡해서 연주한 듯 하다. 중간에 아르페지오 스케일과 트릴을 넣던데, 그 부분은 아마 피아노 반주가 하던 부분으로 기억되는데... 이 이후에도 곡들을 약간 자기 입맛대로 편곡해서 연주했다. 헝가리 무곡은 약간.. 전반적으로 느림/빠름의 대비가 약해서 살짝 아쉬웠다..
이후에는.. 곡 순서들이 솔직히 기억이 안난다... 스피카토 소티에가 난무하는 비에냐프스키의 Caprice A minor를 연주했는데 그 왼손과 손목의 날렵함이란... 그 외에도 크라이슬러의 schoen Rosmarin, 또 기억이 안나는 제작자의 perpetum mobile? 쉰들러 리스트의 테마..... 열심히 듣다가 쉰들러 리스트를 연주하겠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아, 펄만 유태인이었지...'하는 생각과 함께 주변에서 줏어 들은 애기가 잠시 떠올라서 살짝...
그 외에도 Bazzini의 La Ronde des Lutins... 이 곡이 끝나자 엄청난 박수가.... 정말 놀라운 연주였다. 또한 중간에 각각의 현에서 포지션 쉬프팅하며 같은 음을 짚는 부분이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E-A-D-G로 가는데, 처음에는 EADG로 연주하고 다음 반복부에서는 EGDA로 연주해주는... 반복부에서는 나름대로의 변주도 가미하여 연주를 하고... 아쉬운 점은 왼손 피치카토를 하는 부분에서 사람들이 왜 웃는지 알 수가 없었다는.... 웃긴가? ㅡ.ㅡ;; 중간에 잠시 주제가 바뀌면서 피아노가 먼저 나오는 부분에서 힘든 한숨을 내쉬면서도 연주할 때는 혼신의 힘을 담아 연주하는 펄만의 모습이 인상깊었다.. 가면 갈 수록 펄만의 곰손에서 뿜어나오는 끈적끈적한 음색과 살아 꿈틀대는 오른 손목과 손가락.... 아.. 갑자기 레슨때 항상 지적받는 손목 전환이 떠올라 주면서.. ㅡ.ㅡ;
아..또 앵콜 뭐했지? ㅡ.ㅡ;;; 거의 닭 수준의 기억력이라서... 아 맞다.. 하이페츠가 편곡한 거쉬윈의 포기와 베스 중 It ain't necessarily so? 인가 하는 곡을 연주했던 듯...
기립박수가 끊임없이 이어지자 악기를 두고 나와서는 하품을 하는 모습과 양 손을 모아 머리에 베게를 베는 포즈를 취하며 양해를 구하고 연주를 마무리 했다..
혹시나 싸인회를 기대하고 나갔으나, 역시나 없었고..... 사진은 그냥 집에 악기 장식장에 넣어둬야겠다..
오늘의 공연은 정말 기억에 남을 거장의 연주였다. 불리한 신체적 여건과 건강속에도 저런 연주를 보일 수 있다는 점이 놀랍고, 과연 젊었을 때는 어떤 연주를 선보였을지 궁금한... 뭐 유튜브나 이런데를 뒤지면 많이 볼 수는 있지만 아무래도 현장만을 못따라가니....
그리고 그 유명한 1714 Stradivari 'Soil'의 소리를 들어볼 수 있었다는 점...(혹시나 아니면 할 수 없고 ㅡ.ㅡ;;).. 회식을 버리고 오기 잘했다 ㅡ_-;;;
오늘 자리가 너무 좋아서.. 앞에도 아무도 없고.. 바로 코 앞에서... 마치 혼자만을 위한 연주회의 기분?... 펄만이 앉아서 연주하니 목도 덜 아프고...(덜 올려다 봐도 되서....)... 봉잡은 기분..
비엔나, 오스트리아 (AP) -- 누군가가 베토벤을 죽였을까? 한 비엔나의 병리학자가 베토벤의 주치의가 그랬다고 주장한다 - 부적절한 과용량의 납으로 인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연구자들은 확신하지는 않지만, 한가지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베토벤은 1827년 사망하기 수년 전부터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머리카락에서 독성 농도의 중금속이 발견되었고 그 후, 2년전, 유골 조각에서 발견되어 이전의 연구는 베토벤이 납중독으로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이 발견들은 납중독이 영향을 미쳐 결과적으로 57세에 그가 사망하게 했다는 믿음을 굳건히 했다.
하지만 비엔나의 법의학 전문가 크리스티안 라이터(Christian Reiter)는 베토벤의 머리카락에 CSI와 같은 방법을 적용한 수개월의 노력 끝에 더 많은 사실을 알아냈다고 한다.
그는 지난주 베토벤 저널(Beethoven Journal)에 발행된 그의 분석에서 베토벤의 생애 마지막 수개월 동안 그가 의사, Andreas Wawruch에게서 복수에 대한 치료를 받을 때 마다 납의 농도가 치솟았다고 밝혔다. 이 치명적인 용량은 베토벤의 병든 간에 스며들어 결국 그를 죽게 했다고 라이터는 연합뉴스에 말했다.
"그의 죽음은 Dr. Wawruch의 치료때문입니다," 비엔나 의과대학의 법의학과 석좌교수 라이터는 말했다. "하지만 Dr. Wawruch를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 그가 베토벤이 이미 심각한 간질환을 앓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누구도 그 때는 알 수 없었다.
1827년 3월 26일, 오스트라이의 수도에서 작곡자가 사망한 후 부검을 해서야 의사들은 베토벤이 간경화와 복수로 고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라이터는 Wawruch가 베토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복강천자를 반복했고, 그 후 납이 함유된 첩포로 상처를 닫았다고 말한다.
비록 그당시 납의 독성에 대해 알려져 있었지만, 치료연고에 함유된 용량은 "건강한 사람을 죽게 할 만큼 독하지는 않았습니다", 라고 라이터는 말했다. "하지만, Dr. Wawruch는 그의 치료가 이미 병든 간을 공격해 그 장기를 죽이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몰랐을 것입니다."
심지어 부종이 발생하기 전, Wawruch는 그의 일기에 베토벤의 사망 수개월 전의 폐렴 집단발병을 납이 포함된 염제로 치료했다고 적었는데, 더 악화시켰다고 연구자들이 믿는 납중독의 현존하는 사례 중 하나다.
하지만 라이터는 Wawruch가 베토벤의 마지막 수 주 동안 납이 함유된 연고를 반복적으로 투여해서 베토벤에게 납중독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머리카락 몇 가닥을 분석한 결과는 "납의 축적이 매우 심하게 상승한 여러개의 피크"가, 베토벤이 스스로 Wawruch에게 부종치료를 받았다고 적은 1826년 12월 5일부터 1827년 2월 27일 사이, 4번 있었음을 보여줬다고 라이터는 말했다. "매번 복강천자 때마다, 우리는 머리카락에서 납의 농도가 증가했다고 봅니다."
그러한 주장들은 그 주제를 연구한 다른이들의 흥미를 돋군다.
"그의 자료는 베토벤이 그의 생애 마지막 111일에 걸쳐 납에 상당히 노출이 되었고, 이 납은 그의 담당의가 처방한 바로 그 약이었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베토벤의 유골에서 다량의 납을 발견한 시카고 근교의 미국 에너지부의 아르곤 국립 연구소에서 팀을 이끌고 있는 Bill Walsh가 말했다. 2년전의 저 연구에서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을 수년간의 지병의 원인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Wawruch와 연관짓지는 않았다.
"저는 베토벤의 죽음이 이미 심각한 납중독 상태인 그에게 이 납이 포함된 약을 투여함으로 생겼을 것이라고 봅니다," Walsh가 말했다.
머리카락의 분석은 일반적으로 수개월이 아닌 수년간의 고농도의 납 축척을 보여주는 뼈의 분석만큼 신뢰도가 있다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그는 계속해서 덧붙였다.
머리카락은, "샴푸, 찌꺼기, 기후 문제등의 외부 물질에 의한 오염의 문제점이 있습니다. 머리카락 바깥쪽의 막은 손상되기 쉽습니다," 그는 베토벤의 마지막 수 개월간 그에게 투여된 약의 정확한 조성에 대해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시사했다.
무었이 Wawruch의 치료 이전에 납중독을 유발했는지에 대해서, 일부는 베토벤이 마시던 납이 섞인 와인이라고 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고농도의 납이 섞인 온천물을 마셔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직 궁극적인 원인은 모릅니다," 라이터가 말했다. "하지만 그는 죽기 수년 전부터 병약했습니다."
베토벤 저널은 캘리포니아의 베토벤 연구를 위한 산 호세 주립대학의 Ira F. Brilliant 센터에서 발행한다.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하인리히 빌헬름 에른스트는 1814년 Morovia의 Brünn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 바이올린을 배우고 고향에서 두각을 나타낸 후 1825년 비엔나 음악학교에 들어가서 Joseph Joachim과, 브람스의 초창기 동료인 Ede Reményi를 제자로 두고있던 Joseph Böhm의 제자로 들어간다. 그는 Mozart의 피아노 제자이며, Albrechtsberger와 Winter에게 작곡을 배운 Ignaz von Seyfried에게서 작곡수업을 받는다.
1828년 그는 비엔나에서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 후에 무단결석으로 징계처분을 받고는 수업을 그만두게 된다. 그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에 깊게 감동을 받아 그의 스타일을 따라한다. 콘서트 투어를 떠난 그는 파가니니의 연주를 더 듣기 위해 파리로 향하고, 그의 출판되지 않은 작곡들을 귀로 듣고 연주한다. 후에 그는 파가니니의 Nel cor pìu non mi sento를 정확히 연주해서 청중들과 파가니니 그 자신도 놀라게 한다. 그는 Carnaval de Venice의 주제에 의한 자신의 스타일의 변주곡을 작곡해서 종종 콘서트 끝에 연주했다. 이 작품은 에른스트의 관객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으며 어디를 가나 연주했고, 그의 상징이 되었다. 1837년에는 파가니니의 도착을 기대하며 마르세이유에서 자신의 연주회를 연다.
1843년에는 런던을 방문하여 1850년대까지 거기서 머무른다. 계속해서 1857년까지 유럽을 순회하다가 관심을 실내악으로 돌려 1859년부터 요아힘, 비에냐프스키, 그리고 피아티와 함께 Beethoven Quartet Society 활동을 한다.
말년에는 건강이 악화되고 오랫동안 지속되온 신경통으로 연주를 할 수 없게 된다. 생애의 마지막 7년동안 그는 은퇴하여 주로 니스에서 Polyphonic Studies와 같은 작곡을 하며 지낸다. 1865년 10월 8일에 에른스트는 니스에서 사망한다.
에른스트는 당대에 매우 높게 평가받던 연주자였지만, 오늘날에는 거의 잊혀졌다. 에른스트는 당대에는 파가니니의 가장 뛰어난 후계자이자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다성연주법을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새로운 특유의 방식으로 다성음의 바이올린곡을 작곡하였으며 그 시대에는 전례가 없던 수준이었다.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여섯개의 다성 연습곡(Six Polyphonic Studies for Solo Violin)은 거장의 면모를 보여주는 역작이다. 비에냐프스키의 에튜드나 파가니니의 카프리스와는 다르게 음악적이어서 기지와 감정이 듣는이를 만족시켜준다. 첫 에튜드는 활기찬 scherzo con spirito다. 이 곡은 밝은 모티프로 만들어졌고, 주 멜로디와 흐르는 스케일로 이뤄진 두 선율의 멜로디로 나란히 구성되있다.
두번째와 다섯번째는 전 곡에 걸쳐 더블스톱으로 구성된 카프리스이며, 네번째 곡은 비슷한 눈부신 스케일과 아르페지오가 전체에 걸쳐 흐르는, moto perpetuo와 비슷한 곡이다.
세번째와 여섯번째 곡은 특히 흥미롭다. 세번째 에튜드는 매우 서정적이며 또한 미묘한 아름다움의 복잡한 다성음의 곡이다. 하지만 동시에 레가토 더블스톱 패시지들을 연주해야 하므로 테크닉적으로 매우 어렵다. 이 패시지들이 작품의 전체를 서정적으로 꾸미며 이는 파가니니의 음악에서는 들을 수 없는 것이다.
기돈 크레머와 루지에로 리찌와 같은 대가들이 쇼피스로 녹음했던 여섯번째 연습곡 "여름의 마지막 장미"는 아마도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일 것이다. 이 곡은 동명의 아일랜드의 민요에 근거한 주제의 여러 변주들의 모음이다. 형식상으로 이 곡은 분명히 파가니니를 모방하고 있다. 에른스트의 뛰어난 즉흥연주의 예가 현을 넘나드는 아르페지오와 스케일 반주를 하는 동시에 멜로디를 뜯는 왼손 피치카토이다.
Christophe Boulier의 마지막 장미 변주곡 연주. 내가 들어본 최고의 연주중 하나.
벨기에 바이올리니스트 외젠-오구스테 이자이 (Eugéne-Auguste Ysaye) 는 같은 시대의 다른 위대한 연주자들로부터 질투보다는 찬사를 받던 그 시대의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 사람이었다. 리에(Lige)에서 1858년에서 태어난 그는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오페라 지휘자였던 아버지 니콜라스-요제프 이자이(Nicolas-Joseph Isaye)에게서 4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 1865년 리에 음악원에 들어가서 D. Heynberg를 사사했다. 1868년 어머니의 사망과 스승과의 불화로 그는 아버지와 함께 콘서트 투어를 떠났고 아버지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했다. 1872년 리에로 돌아와서 Rodolphe와 Lon Massart를 사사하여 1879년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했다. 브뤼셀(Brussels)에서 비에냐프스키(Wienawski)에게서 공부를 계속 했고 후에 1876년부터 1879년까지 파리에서 비외탕(Vieuxtemps)을 사사했다.
파리를 떠난 후, 이자이는 1882년까지 베를린의 Benjamin Bilse 오케스트라의 수석으로 있었다. (Benjamin Bilse beer-hall orchestra는 후에 Berlni Philharmonic이 된다) 많은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음악가들이 그의 연주를 듣고자 왔고, 그중에 요제프 요아힘(Joseph Joachim),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클라라 슈만(Slara Schumann), 그리고 이자이에게 계약을 그만두고 같이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한 안톤 루빈슈타인(Anton Rubinstein)이 있었다. 그 시기에 그만의 음악 발전에 도움을 준 안톤 루빈슈타인과 함께 스칸디나비아와 러시아로 콘서트 투어를 떠났다.
1883년 그는 파리로 돌아와서 세자르 프랑크(Csar Franck), 까미유 생상(Camille Saint-Seans) 그리고 젊은 세대의 에른스트 쇼송(Ernest Chausson),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 빈센트 당디(Vincent D'Indy), 그리고 당시 프랑스 바이올린 음악에 큰 영향을 미치던 끌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와 같은 유력한 작곡가들과 교류를 했다.
27세 때 파리의 Concerts Colonne 중 하나의 독주자로 추천되었고 음악 연주자로서의 시작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다음해에 이자이는 조국인 벨기에의 브뤼셀 음악원의 교수직을 수여하였다. 이것으로 1898년 그가 음악원을 떠난 후, 그의 마지막 해까지도 그의 주된 일 중 하나였던 지도자로서의 경력이 시작되었다. 그의 훌륭한 제자들 가운데에는 요제프 긴골드(Josef Gingold), 비올리스트 윌리엄 프림로즈(William Primrose), 나탄 밀슈타인(Nathan Milstein), 루이스 페르싱어(Louis Persinger), 알베르토 바흐만(Alberto Bachmann), 매튜 크릭붐(Mathieu Crickboom), 그리고 야샤 브로드스키(Jascha Brodsky)가 있다.
음악원의 교수로 재직 중에도 이자이는 유럽 전역과 러시아, 그리고 미국을 포함한 세계의 더 넓은 지역에서 계속해서 순회공연을 했다. 특히 그의 손의 상태와 연관된 (아마도 당뇨와 관련된) 건강상의 문제에도 이자이는 연주에 온힘을 다했고, 끌라우드 드뷔시, 까미유 생상, 세자르 프랑크, 그리고 에른스트 쇼송을 포함한 많은 저명한 작곡가들이 그에게 주요한 작품들을 헌정했다.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는 그에게 결혼 선물로 헌정되었고 이자이는 1886년 브뤼셀에서, 그 후 파리에서 초연했다. 다른 헌정곡들은 쇼송의 포엠(Peom)과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드뷔시의 현악사중주가 있다.
그의 건강상태가 악화되자, 이자이는 더욱 교육과 지도와 작곡에 열중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에는 6곡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op. 27, 한 곡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 op. 28,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여러 독주자와 (한대 또는 두대의 바이올린, 비올라와 첼로, 현악 사중주) 오케스트라를 위한 위한 8곡의 시 (poème élégiaque, poème de l'Extase, Chant d'hiver, poème nocturne, 기타), 베이스를 제외한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poème de l'Exil), 두 곡의 현악 삼중주, 한 곡의 현악 오중주, 그리고 생애 말기에 왈론 사투리로 쓰인 한곡의 오페라(Peter the Miner)가 있다.
Pire li houeu(Peter the Miner)는 리에와 브뤼셀에서 상연했고, 그는 건강상 브뤼셀의 상연에만 참석했는데, 그가 1931년 5월 12일, 사망하기 3주 전이었다.
1898년 이자이는 뉴욕 필하모닉(New York Philharmonic)의 지휘자 자리를 제의받았으나 독주 스케쥴로 바뻐서 사절했다. 1918년 그는 신시내티 심포니 오케스트라(Cincinnati Symphony Orchestra)의 지휘자를 수락하고 1922년까지 있으면서 여러 녹음을 남겼다.
외젠 이자이가 전 세계에서 유명한 소나타 리사이틀을 함께한 피아니스트 라울 푸뇨와 있다. 1902년경
연주자로서 이자이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고 매우 개성적이었다.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는 이자이 같은 연주자는 유래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칼 플레시(Carl Flesch)는 그를 "내 생애 들어본 가장 걸출하고 개성적인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말했다.
이자이는 비브라토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부터 그가 말하기를 "끊임없이 울리게 하지않지만, 끊임없이 울리는" 격렬한 비브라토에 이르기까지 폭넓고 유연한 음색을 가지고 있었다.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처럼 그는 포르타멘토(portamento)를 오늘날의 연주자들보다 더 자주 사용했지만 신중하고 고상하게 사용했으며 전혀 단순한 기교적 수단이 아니라, 그의 연주법은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목적이 되는 감정, 운율, 마음을 나타지 않는 것은 없다"라고 한다.
아마도 이자이의 연주에 있어 가장 독특한 특징은 노련한 루바토(rubato)다. 이자이의 루바토는 다소 특이하다; 그는 자신의 자유로운 서정적 선율하에 반주자는 엄격한 박자를 유지하도록 하면서 "한 음표에서 템포를 뺏을 때마다, 네 마디 안에서 정확히 채워 넣는다" 지휘자 헨레 우드 경(Sir Henry Wood)이 말했다. 이는 프레데릭 쇼팽(Frédéric Chopin)의 루바토와 같지만, 녹음된 초창기의 모든 연주자들 중 유일하게 진정한 루바토를 보여준다.
외젠 이자이가 알베릭 마냐드, 가이 로파르츠와 함께 그의 낭시 음악원의 학장실에 있다. 1911년경
이자이는 모든 레파토리에 능숙한 연주자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의 바하와 베토벤의 해석은 감탄스러웠고 그 이후의 작곡자들이나, 후기 낭만파나, 그리고 초기 근대 작곡가들의 작품들에 매우 뛰어났다. 특히 막스 부르후(Max Bruch), 까미유 생상, 그리고 프랑크는 그를 자신들의 가장 뛰어난 해석자로 불렀으며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에도 의심의 여지없이 최고였다. 그의 테크닉은 화려했고 정교하게 연마되었으며, 어떤 음악적인 의미 없이는 사용하지 않았다. 이런점에서 그는 최초의 현대적인 바이올리니스트로 생각된다.
이자이는 비에냐프스키와 비외탕을 본받아 바이올린 연주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그의 연주와 교습법에 관한 많은 회고담들이 있다. 예후디 메뉴힌(Yehudi Menushin)은 자신의 스승인 루이스 페르싱어의 은사, 이자이를 만나기 위해 브뤼셀을 방문해서, 다른 훌륭한 지도자들에게도 학생들에게 강조하라고 말하던 조언인, 스케일과 아르페지오를 연습하라는 매우 적절한 가르침을 받은 일을 회상한다. 요제프 시게티(Joseph Szigeti)는 이자이를 너무 이른 때에 비브라토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 창시자로 회상했으며, 여기에서 이자이 스스로 비브라토를 엄격히 사용한 이유를 발견한다. 한편으로 칼 플레시는 이자이의 영향이 가장 중요하고 지속적이었다고 공언했다.
당뇨로 극심히 고생하여 왼발을 절단해야 했던 외젠 이자이는 끝내 1931년 사망하여 브뤼셀의 Ixelles Cemetery에 묻힌다.
1937년 그를 추모하여 유진 이자이 국제 콩쿨이(Eugene Ysaye International Competition)이 창립되었고 1951년에 퀸 엘리자베스 콩쿨(Queen Elisabeth Music Competition)이 되었다.
그의 악기는 바이올린은 Giuseppe Guarneri filius Andrea 1720, Antonio Stradivari 1734 "Herkules", Guarneri del Gesu 1740, 비올라로는 C.A. Testore 1740이 있다.
Giuseppe Guarneri del Gesu 1740 ex-Ysaye
이자이의 A. Stradivary 1734 "Herkules"는 1908년 성 페테스부르그의 왕립극장에서 과르네리 1740으로 연주하는 동안 도난을 당했다. 그는 스트라디바리를 갱의실에 놔뒀었다. 1925년 파리의 한 바이올린 상점에서 다시 발견되었다 - "Lost Forever -- The Mystery of Stolen Violins", Leslie Sheppard, The Strad, September, 1977.
비록 스트라드 따뜻하고 강력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자이는 연주회에서 연주하기 훨씬 덜 피로하고 대부분의 환경에서 그의 성향에 잘 반응하는 과르네리를 주로 사용했다. 그는 스트라드를 비상시에 사용하는 악기로 생각해서 일반적으로 줄이 끊어질 때를 대비하여 오케스트라 근처에 두었다 - Ysaÿe, Antoine Ysaÿe, W. E. Hill & Sons, Great Missenden, 1980.
Marin Marais는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비올 연주자였다. 그는 Jean-Baptiste Lully에게서 작곡을 배웠고 종종 그의 오페라들을 지휘했으며, 베이스 비올의 거장 Monsieur de Sainte-Colombe에게서 6달 동안 배웠다. 1676년에 베르사이유 왕궁의 음악가로 고용되었다. 그는 궁정 음악가로서 상당히 성공하여 1679년에는 "ordinaire de la chambre du roy pour la viole"에 임명되었고, 1725년에 은퇴했으며 루이 14세와 루이 15세를 모셨다.
그는 베이스 비올의 대가였고 프랑스 최고의 베이스 비올 음악 작곡가였다. 그는 베이스 비올을 위한 통주저음의 작품들인 5권의 "Pièces de viole (1686-1725)"를 저술했다. 이 작품들은 궁정에서 매우 인기가 이었고 이로 인해 그는 후대에 "비올의 왕국을 세우고 확립한 ("founded and firmly established the empire of the viol", Hubert le Blanc, 1740) 사람으로 기억된다. 이 작품들은 전형적인 춤곡뿐 아니라 fantaisies, rondeaux, tombeaux, 그리고 방광에서 돌을 빼내기 위한 시술을 묘사한 유명한 Le tableau de l'opération de la taille과 같이 제목이 붙은 작품들이 (마레는 그것들을 "pièces de caractère"라고 불렀다) 포함되어 있다.
그의 다른 작품들은 Pièces en trio (1692)와 , Alcyone (1706)가 격동적인 장면으로 유명한 4개의 오페라들 (1693-1709)이 있다. Maire의 4개의 오페라들에서 (Alcide,1693; Ariane et Baccus,1696; Alcione,1706; Sémélé,1709) Lully의 영향을 볼 수 있다. Pièces en trio pour les flutes, violon, et dessus de viole (Paris, 1692)는 프랑스 최초의 트리오 소나타로 여겨진다.
Titon du Tillet는 Le Parnasse françois에서 마레의 두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의 네번째 작품집 "미궁(The Labyrinth)"는 다채로운 조를 겪으며 다양한 불협화음들을 연주해서 미궁에 빠진 사람의 불안감을 엄숙한 악절로, 그 뒤에는 빠른 악절을 통해 표현한다. 다행히도 미궁을 빠져 나오며 우아하고 꾸밈없는 샤콘느로 마무리 한다. 하지만 그는 음정이 미묘하게 오르내리는 조화롭고 선율적인 음색의 심포니를 위한 작품, La Gamme(The Scale)로 음악 권위자들을 더욱 놀라게 한다.
그의 작품의 상당수는 비올라 다 감바(Viola da gamba)를 위해 쓰였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엄격히 말하자면 그 악기는, 17세기와 18세기 초기의 9개의 다른 크기의 악기들을 포함하며 일반적으로 비올라 다 감바로 불리는, 비올족의 작은 베이스다. 마레의 악기는 - 비올라 다 감바, 베이스 비올, 바세 드 비올(basse de viole), 또는 간단하게 감바(gamba) - 현대의 첼로보다 다소 작으며 프렛(fret)이 있고 A1, D, G, c, e, a, d1로 조율하는 7개의 현이 있었다. 그당시 사람들에 따르면 마레는 당대 최고의 베이스 비올 연주자였다. Hubert le Blanc는 마레가 비올을 "천사와 같이" 연주했다고 하며, Johann Gottfried Walther는 그를 "비할데 없는 프랑스 비올라 다 감바 연주자"라고 불렀다. 작곡자로서 그의 훌륭한 솜씨에 대한 평가도 열광적이었다. Joachim Christoph Nemeitz는 마레의 작품들은 "온 유럽에 알려졌다"고 공언했다. Titon은 "누구라도 풍부하고 우아한 이 음악가의 천재성을 그가 작곡한 수많은 작품들에서 알 수 있다. 누구라도 그 작품들 도처에서 훌륭한 스타일과 놀랄만한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Sainte-Colombe와 마찬가지로 마랭 마레의 삶에 대해 거의 알려지 있지 않다. 마랭 마레는 1676년 9월 21일 파리출생의 Catherine d'Amicourt와 결혼했다. 그들은 19명의 자녀를 낳았다.Marais의 Pièces de viole 사본이 Éditions J.M. Fuzeau에 의해 출판되었다. 그의 기악곡 작품집 전부를 수록한 교정판이 7권으로 John Hsu에 의해 편집되어 Broude Brothers에 의해 출판되었다.
이 회화는 마랭 마레의 가능성이 약간 있어보이는 인물을 포함하고 있다. 그는 왼편에 비올을 들고 앉아있다. 이 장면에서 그는 1707년에 작곡한 그의 삼중주 소나타의 악보를 넘기고 있는 La Barre가 이끄는 음악가들의 구성원이다. 제일 오른편에 앉아 있는 사람은 자신이 La Barre의 음악 모임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이 그림을 의뢰한 부유한 아마추어다.
Dieterich Buxtehude, Toccata in d, Bernard Foccroulle
Dieterich Buxtehude Toccata F-dur, Mästaren från Helsingborg
Dieterich Buxtehude, g minor prelude, Gustav Leonhardt
생애
덴마크에서의 초년기
그는 Diderich Buxtehude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고 생각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1637년에, 그당시 덴마크령이었던 스카니아(Scania, Skane)의 헬싱보그에서 태어났다고 받아들이나, 연구가들은 그의 출생시기와 지역에 대해 의문시한다. 그의 사망기록에는 "그는 덴마크를 그의 조국으로 생각했으며 약 70세까지 살았다"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가 그당시 덴마크 군주국의 일부였던 홀슈타인(Holstein) 공국의 (현재 독일) 올데슬뢰(Oldesloe)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그는 후에 이름을 독일식으로 고치고, 문서에 Dieterich Buxtehude라고 서명하기 시작한다.
뤼벡: 마리엔 교회
그는 처음에는 헬싱보그 (1657-1658), 그 후에 엘시노르 (1660-1668), 그리고 마지막으로 1668년 부터 뤼벡의 마리엔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였다. 자유로운 황성 뤼벡에서 그의 지위덕에 그의 음악 이력은 상당히 자유로웠고, 그의 자주적은 태도는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 요한 마테존(Johann Mattheson), 게오르그 필립 텔레만(Georg Philipp Telemann), 그리고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와 같은 후기 바로크 거장들의 생애의 본보기가 되었다.
1673년 그는 다양한 분야의 연주자들을 끌어들여서 아벤트무지크(Abentmusik)으로 알려진 저녁 음악연주를 조직하였고, 1810년까지 교회의 특색으로 남아있었다. 1703년 헨델과 마테존은 북스테후데를 만나기 위한 여행을 했다. 그가 그들을 만났을 당시에 북스테후데는 늙었고, 은퇴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헨델과 마테존에게 뤼벡의 그의 지위를 제의했으나 이를 승계하는 오르간 연주자는 그의 나이 많은 딸, 안나 마가레타(Anna Margareta)와 결혼해야 한다고 조건으로 제시했다. 헨델과 마테존 모두 제의를 거절하고 도착한 다음날 떠났다.
1705년, 그당시 20살의 젊은 바흐가 아멘트무지크를 듣고, 그 걸출한 뤼벡의 오르간 연주자를 만나 그의 연주를 듣고, 바흐의 설명대로 "그의 예술의 이런 저런 면모를 파악하기 위해" 아른슈타트에서 부터 뤼벡까지 400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걸어와서 거의 3달동안 머물렀다.
출생: 1879년 7월 9일 - 이탈리아, 볼로냐 사망: 1936년 4월 18일 - 이탈리아, 로마
오또리노 레스피기는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음악학자이자 바이올리니스트(비올리스트)이다. 그는 로마 3부작과 세 편의 옛 아리아와 춤곡으로 잘 알려져있다.
이탈리아 작곡가인 오또리노 레스피기는 고향인 볼로냐에서 음악을 공부했고 이후에 잠깐동안 성 페테스부르그(St. Petersburg)에서 림스키-코자코프(Rimsky-Korsakov)를 사사했다. 비올라 연주자이며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였고, 초기 음악에 대한 관심과 지도자로서의 명성을 얻었던 그는 1913년 로마에 정착했다.
오케스트라 음악
레스피기는 주로 그의 활기찬 교향시들, 특히 Fontane di Roma (로마의 분수), Pini di Roma (로마의 소나무), 그리고 그당시 민족주의 정신의 부흥을 더욱 찬양하는 Feste Romane (로마의 축제) 등으로 널리알 려졌다. 일반적인 레퍼토리에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협주곡들은 적은 비중을 차지한다. 다른 오케스트라 작품들은 Trittico Botticelliano와 그의 오페라 Belfagor의 음악 등이 있다.
편곡
로시니에 근거한 레스피기의 La Boutique fantasque는 발레 관객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다른 오케스트라 편곡들은 Rameau, Pasquini 외 다른 이들의 작품에 근거한 Antiche arie e danze per liuto (류트를 위한 고풍의 무곡과 아리아)와 Gli uccelli (새) 등이 있다.
그의 삶
레스피기는 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태어났다. 그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르친 그의 아버지는 지역의 피아노 교사였다. 그는 볼로냐의 Liceo Musicale에서 Federico Sarti에게서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배웠고, 초기 음악 학자인 Luigi Torchi에게서 역사공부를 했다. 1900년 레스피기는 이탈리아 오페라 시즌동안 성 페테스부르그의 러시아 왕립 극장의 수석 비올리스트로 러시아로 갔다. 거기서 림스키-코자코프로 부터 작곡을 5개월 동안 공부했다. 그는 또한 1902년 베를린에서 막스 부르흐에게 작곡교습을 받았다. 관심을 완전히 작곡으로 돌린 1908년 이전까지는 주로 Mugellini Quintet에서 수석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했다. 1913년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의 작곡 교사로 임명되어 로마로 옮겨온 후, 남은 생애를 그곳에서 살았다. 1923년부터 1926년 까지 그는 음악원의 원장이었다. 1925년 Luciani와 함께 기초 교본인 'Orpheus'를 저술했다.
말년동안 그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당과의 부자연스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아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와 같은 거침없는 비평가들을 그 정권하에서 계속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의 로마 3부곡 중 세 번째 부분인 Feste Romane는 파시스트 정권하의 이탈리아를 찬양하려는 정권의 요구에 부합하는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Shostakovich)의 작품들의 상당수 처럼, 그 '찬양'은 비록 풍자적이지는 않지만, 애매모호했다. 이 장엄하고 다소 허영스러운 작품은 토스카니니와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의해 1929년 초연되었다. 토스카니니는 그 음악을 1942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그리고 1949년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RCA Victor를 위해 녹음했고, RCA는 두 버젼 모두를 LP로, 후에 CD로 발매했다.
레스피기는 또한 16-18세기의 이탈리아 음악에 헌신한 음악학자였다. 그는 끌라우디오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와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의 음악들과, 베네데토 마르첼로(Benedetto Marcello)의 디도네(Didone)를 출판했다. 이 옛날의 음형에 대한 그의 귀의와 작곡의 스타일 때문에 그를 신-고전주의의 전형적인 대표자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사실 신-르네상스나 신-바로크가 초기 작품들에 근거한 그의 작품들을 평하는데 더 정확할 것이다. 대부분의 신-고전주의 작곡과들과 달리 레스피기는 대체로 고전주의 시대의 음악 작풍을 벗어나 있다. 그는 고전주의 이전의 선율 스타일과 음악형태를 19세기 후반의 낭만주의 화성과 기조를 결합시키는 것을 택했다.
그는 "I Pini"라고 불리는 로마의 빌라에서 사망했다. 매장식이 있던 다음 해에 그의 유해는 그의 출생지인 볼로냐로 이장되었다.
레스피기와 그의 아내 엘자가 잠든 무덤
그의 아내인 엘자 레스피기(Elsa Respighi, 1894-1996)는 그의 제자였다. 가수 (메조-소프라노)이자 작곡가였던 엘자 레스피기는 레스피기의 작품 Ancient Airs and Dances의 발레(ballets)를 만들었고, 그의 마지막 오페라 Lucrezia를 1937년에 완성시켰다. 긴 인생 동안 그녀는 남편의 작품을 끊임없이 옹호했다. 1962년에 그녀는 레스피기의 전기를 출판했다. 1969년에는 이탈리아의 음악 교육을 장려하기 위해 베니스에 Fondo Respighi를 설립했다. 그녀는 또한 1979년 레스피기 100주년 기념 축전의 최전선에 서서 오랫동안 간과되어 온 작품들 다수를 처음으로 연주하고 녹음했다. 그 이후 주로 성악 독창곡들인 그녀의 여러 작품들을 초연했다. 1955년 엘자 레스피기는 20세기 초반의 문화에 가장 영향을 끼친 인물들과의 만남들을 자서전에 옮겼다.
그의 음악
그는 러시아 관현악의 색채와 다소 격렬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의 화성 기법을 이탈리아 음악에 접목시킨 작곡가였다. 볼로냐 리체오 음악원에서 공부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림스키 코쟈코프에게 배웠으며, 그곳 오페라 관현악단의 수석 비올라 연주자로 일했다. 레스피기는 외국의 대가 선생들로부터 관현악 색채를 터득했고 관현악곡 작곡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02년 볼로냐에서 레스피기의 피아노 협주곡이 연주되었다. 그 해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의 연주회에서 오케스트라를 위해 작곡된 "notturno"가 연주되었다. 그는 희곡 오페라 "Re Enzo"와 오페라 "Semirama"로 인정받게되며, 1913년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 작곡 교수로 위촉되었다. 1924년 음악원의 원장이 되었으나 1926년 사임한다.
레스피기는 관능적이고 퇴폐적인 로마의 풍조에 매력을 느껴, 교향시 D'Annunzio와 그의 유명한 작품들 - Fontane di Roma와 Pini di Roma 로 그려냈고, 교향시의 창작에서 미묘함과 다채로움을 표편하려 했다. 다른 작품들로는 Vertrate di chiesa (1927); Gli ucelli (1927); Feste Romane (1927); 그리고 Trittico Botticelliano (1927) 등이 있다.
레스피기는 또한 옛 이탈리아의 음악에 매력을 느껴 Antiche arie e danze per liuto(류트를 위한 옛 춤곡과 아리아)를 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 중 하나는 로시니(Rossini)의 작품들을 편곡하여 1919년 런던에서 Diaghilev의 러시아 발레단에 의해 연출된 La Boutique fantasque이다. 후에 로시니의 피아노 작품을 편곡한 Rossiniana (1925) 도 발레작품이다.
오페라 작곡가로서 레스피기는 그의 조국 밖에서는 덜 성공적이었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1923년 밀라노에서 상연된 희극 오페라 Belfagor와, 우울한 노르웨이의 H. Wiers Jenssen의 비극을 (영어권 관객들에게는 John Masefield이 각색한 The Witch로 알려져 있다) 비잔틴 시대의 라벤나로 옮겨놓은 La fiamma (로마, 1934) 가 있다. 다른 것으로는 좀 더 차분한 성격의 "mystery", Maria Egiziaca (1932), 그리고 그의 유작 Lucrezia (그의 아내, Elsa에 의해 1937년 완성되었다) 가 있으며, Lucrezia는, 1935년 그가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서 자유분방한 편곡을 했던 Orfeo를 작곡한, 끌라우디오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의 극적인 레차타티보에 대한 레스피기의 흥미를 보여준다.
리퍼러 기록을 뒤지다가, 링크를 통해 재미있는 저널을 발견했다. 이탈리아 이비인후과학 학회지에 실린 파가니니에 관한 내용인데, 의학적인 측면에서 접근을 했다. 게다가 찾다가 포기했던 L.P.A. Burmeister의 drawing도 포함되어 있다. (관련링크:Nicolo Paganini)